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 뭉개진 인간 찬가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창작물에서 만큼이라도 시련과 역경을 딛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내는 '인간 찬가'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강대한 악의에 동료들과 힘을 합치고 지혜를 짜내며 가끔은 불화를 겪기도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 최후엔 이겨내는 그런 스토리말이다.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 도 분명 그런 왕도적인 인간찬가를 따라갔어야 했던 게임이었다. 이번 글에는 개발사의 사내정치가, 어쩌면 인생작이 될 수도 있었던, 카제나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넋누리를 적어볼 생각이다. 

 

스포있습니다.

 

카제나의 캐치프레이즈『모든 절망을 제로로』

 

 

계기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극히 단순하다. 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법과 질서가 없어진, 인간의 추악한 본성에 노출된 세상에서 주인공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끝없이 인간 찬가를 증명해 나가기 때문이다.

 

카제나는 PV를 보면 알겠지만, 미지의 것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식물로 침식당하는, 그런 희망이 없는 세계관을 광고로 내세웠다. 카제나의 캐치프레이즈가 『모든 절망을 제로로』이기도 했으니, 분명 주인공은 자신의 동료를 죽음이나 절망에서 구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스토리이고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류였다.

 

카제나를 보고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됐던 PV

 

개막 - 이상징후 감지

오픈날 기대를 너무많이 한 탓일까?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뭔가... 이질적이었다.

 

세계관과 전혀 맞지 않은 캐릭터들 간의 케미,

함장(주인공)을 향한 지나친 홀대,

중국 미호요 게임들의 자기들만 아는 설정 + 발 번역 같은 투의 이질적인 대사들  한국산 게임인데 왜 그럴까?

 

풀더빙 게임 중에서 결국 처음으로 스토리 스킵버튼을 누른 게임이 됐다.

 

그렇게 런칭 첫날과 그다음 날 약 10시간 정도 플레이 했으나, 분명 세계관은 좋았다.

하지만 그걸 덧칠할 정도로 캐릭터와 함장 간의 관계는 게임 플레이 내내 마음에 가시처럼 걸렸고 이틀 만에 결국 접었다.

 

‘그냥 그런 게임이었네’ 하고 넘기려던 찰나,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논란의 불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막 - 오웬과 레노아

카제나의 수많은 논란 중에서 스토리와 관련된 논란은 꽤나 중요시된 문제이다.

아래 논란목록에서 개별 문서가 3개나 따로 만들어질 정도이다.

11/5 일자 나무위키 논란 목록

 

 

가장 문제의 쟁점이 된 캐릭터는 두 명.

오웬레노아.

 

오웬 - 주인공을 삼켜버린 신입 전투원

 

 

오웬은 신입 전투원으로 모든 여성 캐릭터에게 사랑받는 함선의 귀염둥이입니다.

함선 내에 그의 인기는 4장에서 자세히 나타나죠.

 

함장의 신체 능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오웬을 내가 한번 구해볼게
그렇게 함장의 배에 구멍이 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오웬에 팔에난 총상이 더 큰 관심사입니다

 

함장 배에 난 구멍 VS 신입 전투원 팔에 난 구멍

무엇을 더 우선시 해야하는지는 안 봐도 될 일이겠죠?

바로 오웬 팔뚝에 난 총상이죠.

 

우리 오웬은 모든 여 캐릭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함장의 배가 뚫리든 알바 아니겠죠.

 

이렇듯 오웬은 카제나의 남자주인공 포지션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함장)는 오웬의 두근두근 연애 시뮬레이션의 친구 A를 맡고 있습니다.

가챠에 돈도 조금 질러주고요. 

 

출시 두달 전에 이렇게 확실히 말했는데... 이상하다 퍼스트(함장)가 오웬인가 from 8/19일자 개발자 코멘터리

 

 

레노아 - 프롤로그 스포有

부함장 레노아

 

레노아가 담당한 일축의 문제는 주인공 홀대 문제입니다.

프롤로그에서는 분명히 함장을 죽음을 각오하고 함장을 살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함장을 플레이 하는 저로서는 분명 이 시점 이전에 거의 연인이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를 쌓았으리라 추측했죠.

 

본인 대신 함장을 함선으로 긴급 귀환시키는 레노아
레노아를 구출한 후의 대화에서 유추하면 각별한 사이인 것 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녀는 다소 거칠지만 함장을 연모하는 부함장에 위치한 캐릭터입니다.

허나 위의 4장에서의 함장 꼽주기,

5장에서의 함장 뒷담화 발각,

함장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캐릭터들을 몰아내는 히스테릭한 인물로 변모해 갔죠.

 

오웬은 함장이 받아야 하는 대우를 독차지하며 결국 NTR 논란의 중심이 됐습니다. 플레이하면서도 특히 여캐와 관련된 부분은 오웬이라는 장애물로 인해 몰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캐릭터 간 서사에 몰입이 안되니 스토리의 큰 맥락조차 잡지 못하게 됐습니다. 스토리의 가독성이 좋은 것도, 설명이 충분한 것도 아니었기에 디스시너지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레노아는 거듭된 함장 꼽주기로 인한 주인공 홀대 논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부함장이라는 위치에서 누구보다 함장을 보좌하고 믿어줘야 하는 극중 매인 히로인임에도 누구보다 앞서서 함장 홀대의 선봉장을 담당했습니다. 위에 가볍게 언급했던 몰입의 부재로 인해서 원래라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던 언사들도 또한 눈살을 찌푸리게끔 만들었습니다.

 

예시를 들자면,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 자꾸 욕설을 섞어가며 말을 거는 느낌입니다.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충분한 친밀감이 생성되지 않았으니 무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유저의 반축을 사게 됐습니다. 

 

'오웬과 레노아는 왜 이런 취급을 받게끔 설계되었을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다행히(?) 뒤에 터진 대형 논란으로 인해 어긋난 캐릭터와 스토리 설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종막 -  'if 스토리',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존재해야만 했던 또 다른 세계

어쩌면 더 좋은 스토리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웬은 정말로 함장을 존경하는 한 소년으로, 레노아는 죽음을 각오하고 함장을 구해낼 만큼 함장을 소중하게 생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럴 수 있는 스토리가 이미 수정됐다고 합니다.

수정된 부분의 정말 일부분만 말씀드리자면, 캐치프레이즈와 장르 그리고 캐릭터 서사입니다.

 

먼저 캐치프레이즈부터 보겠습니다.

 

『모든 절망을 제로로』가 아닌 『악몽을 되풀이해서라도, 0에서 1로』

 

장르입니다.

코즈믹 "루프" from 스토브 공식 2024.04.22

 

뭔가 이상합니다.

캐치 프레이즈도 전혀 반대고, 루프물로서의 기본은 본 게임에는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보이지 않았거든요.

 

많은 유저들의 분노의 클라이언트 뜯기를 시전 하여 시나리오 원안을 발견하였고 그곳은 사뭇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오웬은 함장을 존경하는 어린 수습생,
그리고 아마 첫 희생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함장은 그를 구하기 위해 수없이 루프를 반복하고,
끝내 무너져가는 찰나,
부함장 레노아가 사랑과 지지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오웬을 구하며 모두가 희망을 되찾는 결말.

 

오웬을 계속해서 희생할 수밖에 없는 악몽을 되풀이해서라도 1에 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런 인간찬가를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원래 칭송받아 마땅한 위인입니다.

더러운 사내정치만 아니었더라면.

 

커튼콜 - 사내정치의 게임 고로시

 

디렉터의 긴급라이브

 

카제나의 총괄 디렉터, 디렉터가 긴급라이브를 열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작년 스튜디오 내 시나리오 팀 많은 분들이 퇴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제 지나친 개입 때문이었습니다. 최종 시나리오 마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급함을 가지고 제가 직접 각본에 참여하기도 했고, 제작을 강행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제 지나친 개입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현재 메인 스토리 또한 부족한 시간과 제약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아쉬움 아쉬움 속에서 완성되었으며 작업하신 분들 또한 현재는 퇴직하신 상황입니다.

 

함장의 루프물, 능력 이런 설정들이 왜 인게임에 남아있나요?라는 질문 답변드리겠습니다. 일단 그 현재까지 루프와 관련된 설정들이 중간에 변경된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 내용들에 대한 진행을 오랫동안 시나리오에서도 감당을 하고 제작을 진행해 왔었는데,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에서의 루프에 대한 부분들이 계속 발목을 잡고 완성도를 맞추기 어렵게 하는 코드였던 걸로 내부에서 판단을 하고 그 부분이 덜어진 부분도 있었고요. 

 

그럴 겁니다.

시간루프, 피폐물 두 장르 자체가 굉장히 디자인하기 어려운 장르거든요.

그것을 담당하고 쓰고 있던 시나리오 라이터를 갈아치우니,

최중요 기능인 시간루프 장르를 빼는 것으로 타협을 하여 완성도가 있어 보이게 최선이었겠죠.

억지로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캐릭터니, 고객이니 뭐가 눈에 보였겠습니까.

그냥 있어 보여야 한다니까요.

 

더군다나 내부고발자에 의한 내부자료로 보이는 증거파일을 동봉한 하나의 게시글이 올라옵니다.

간략하게 어떤 식으로 개입을 했는지 정리하면,

 

원안 A가 있고 현 디렉터가 쓴 스토리 B를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하여 B의 것이 점수가 높아 교체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A 원안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인데 어떻게 블라인드 테스트?

결국 B안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나리오 라이터가 갈렸고 디렉터 스스로도 폐기

 

한 디렉터의 개입으로 인해 고결한 등장인물들이 어쩌다가 NTR 금태양이 되었으며, 어쩌다 나만 보면 발작을 일으키는 히스테리녀가 됐는지 파악이 끝났습니다.

마치 캐릭터들이 본래의 인격을 박탈당하고 원치 않는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비통할 따름입니다.

 

폐막 - 인간찬가의 잔해 위에서

한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고결했던 인물들은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들의 인격은 찢겨나갔고,

본래의 영혼은 짓밟혔다.

 

카제나는 패배했다.

 

개발비 600억과 4년 반의 세월을 잃은 개발사의 패배요,

사내정치 앞에 무릎 꿇은 올바름의 패배요,

그리고 그 모든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유저의 패배다.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이런 게임은 안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