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상태를 해제하고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시겠습니까?

구비연님, 약 50일 만에 취업전선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지난번 LG U+ 에서는 조직원으로서의 저에 장단점을 알게 되었다면, 이번 회사에서는 업무의 호불호에 대해서 배우고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론은 퇴사했습니다. 그냥... 생각했던 것들을 적어보겠습니다.

 

 

취업 성공 - 맹독 상태에 빠지다

개요2022년 12월에 졸업식을 하고 지금껏 데이터분석을 향해 달려온 결과 지난주 월요일 드디어 데이터분석가 딱지를 달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도 그저 그런 데이터 분석가입니다. 그렇지만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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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에서 질식 상태에 이르기까지

괴리

면접 전에 pdf로 저장해둔 공고를 수 번을 재확인하며, 거기 있던 맡게 될 직무, 직무요건, 우대사항과 지금하고 있는 현실의 차이에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데이터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허나 정리가 안되어있었죠. 테이블의 개수는 400개가 넘어갔고, 그중 쓰지 않는 것은 80%가 넘어갔습니다. 테이블의 스키마는 자동 생성되는 index칼럼을 제외하면 모조리 문자열이기에, 뭐가 들어가든 오류 없이 잘 받아먹었죠. 그 때문이었을까요, 하나의 칼럼에 규칙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노이즈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분석 환경이 좋기만 바라는 것은 하수이지, 나는 데이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인가? 열심히 클렌징 해보자.'

'근데 도대체 이 지경이 될 때 동안, 주임님은 4년 동안 뭘 한 걸까..? 분석을 전혀 못할 수준의 데이터 상태인데?'

'분석을 하긴 했을까?'

 

책임감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

그렇다면 저는 데이터분석 말고 어떤 일을 했을까요? 크롤링되는 사이트가 업데이트를 하면 XPATH로 참조되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바뀌면 망가져버리는 크롤링 코드를 수정하는 업무와 신입 원생 받을 시즌에 계정 생성, 레벨테스트 배정, 결과지 배분을 자동으로 원사이클로 돌리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그중 뒤에 있는 자동화 단계는 거의 제가 코드를 전부 구축해 두었으나, 정작 중요한 회사 웹사이트가 박살 나서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제 야근은 무엇이었을까요?

 

아! 나오기 전에 한 가지 큰 일을 하긴 했습니다. 50일 동안 진행되는 원생 대상으로 미션이 있었는데, 해당 미션이 끝나가서 누가 50일을 다 채웠고 못 채웠는지 집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해당 업무는 중간쯤 됐을 때 저에게 하달됐고 저는 판별 로직을 주임님께 전해 들어 알고리즘을 구현했습니다. 하나 그 로직이 50일째... 끝나는 날이 되어서야 잘못되어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잘못 집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곧 원생들과 그 부모에게 그 잘못된 결과가 전달이 되든 잘못된 집계값을 가지고 향후 플랜에 반영하든 할 참이었습니다. 근데 왜 호들갑은 저 떨었을까요? 사실 이 50일 미션 자체가 사측에선 별로 큰일이 아니었을까요? 50일 동안 열심히 미션을 수행한 원생들과 그들의 부모님들을 별로 큰일로 보지 않는 걸까요? 자기 애가 50일 열심히 해서 미션 성공자로 분류되어야 하는데 실패자로 연락을 받으면... 좋아할 고객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요?

 

점심을 이틀을 거르며 미션 승패의 로직을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주임한테 의지할 순 없었죠. 전달받은 로직에서 벗어나는 사례를 전달하면, 아 그런가 봐요를 대답하는 로봇에게 저는 무엇을 더 기대하면 좋았을까요. 성공, 실패를 가르는 로직을 아예 새롭게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었고 어떻게 업데이트해야 하는지는 스스로 데이터들을 뜯어가며 발견해 나갔습니다. 어쩔 때는 성공, 어쩔 때는 실패. 또 이럴 때는 성공, 이럴 때는 실패. 열중하고 있는 저에게 주임은 와서 주옥같은 말들을 전했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아라, 대충 해라, 어차피 나중에 고객한테 CS 들어온다.

 

차라리 시간 안에 될 것 같냐고 암암리에 압박을 주던지, 아니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로직을 주던지, 아니면 응원을 하던지 그 많고 많은 발언 중에 왜 하필 저거였을까요. 저의 심리적 압박을 덜어주려는 심산이었을까요. 고객 중심 마인드의 중요성을 손가락이 닳아도 두 번은 닳도록 블로그에 썼던 저에게 저게 도대체 무슨 신병 같은 말일까요. 한 번은 너무 기가 차서,

 

대충 하라는 게, 어떻게 대충 하라 걸까요?

 

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썩어도 데이터 분석가 태그를 달고 있는데 데이터와 타협을 볼 순 없었죠. 

 

결국 해당 업무를 시간 안에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당연히! 기쁘진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한번 퇴사를 고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책임감 없는 동료와 망해있는 분석환경. 이미 위태한 저에게 스트라이크를 꼽은 건 굉장히 사사로운 일이었죠.

 

콜록콜록!

옆사람의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고 물어봤을 때는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합니다.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길래, 1층에 편의점에 가서 마스크를 사다 바치기까지 했지만 중간에 쓰다가 벗더군요. 왜 안 걸린 사람이 쓰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너무 늦은 걸까요. 저도 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게 참 화가 나는 일이더군요. 사수는... 하고 옆 동료는 병원체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맡겨진 업무는? 다시 정해진 날에 정해진 코드 돌리기. 나가겠습니다.

 

<제 업무는 그저 딸깍거리는 소리를 낼 뿐입니다> flaticon

 

왜 퇴사를 결심하게 됐나요?

망설임은 너무나 많았고 그 질문들에 답을 미룰 때마다 그냥 하루 더 출근하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업무적인 괴리감에 상담도 했고 동료와도 개선을 위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빠른 변화를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먼저 지쳤습니다. 나가겠습니다.

 

인사를 담당하는 분이 위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진 못했고. 공고와 직무와의 차이를 중점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졸업하고 2년 반 동안 취준기간을 겪으며 정말 귀하디 귀한 기회를 잡으며 취업했지만, 그렇기에 더욱이나 이 업무를 계속하며 다니는 것은 타협에 가깝고, 나는 데이터 분석의 업무를 하고 싶다. 그리고 첫 출근했을 때 책상과 키보드에 먼지 투성이었다. 내 걸 두고 가마 다음 사람한테는 그걸 줘라, 컴퓨터 세팅 다 되어있으니 포맷하지 말고 그냥 넘겨줘라 세팅하려면 또 한세월이다.

 

이것도 못 버텨? 다들 버티는데? 배가 불러서 그런 거야?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업무가 고통스러웠으면 버텼을까요. 직장 내 부조리였으면 버텼을까요. 취준생이 조금 더 암울했으면 버텼을까요. 여윳돈이 없었다면 더 버텼을까요. 하지만 데이터 분석가라고 뽑아놓고 데이터분석 업무가 전혀 없는 건 못 버티겠네요.

 

잠시 놀다 왔습니다.

경력으로 쓸 수는 당연히 없고 성과를 낸 건 당연히 없습니다. 오히려 병이나 달고 나왔죠. 그리고 가슴통증도 달고나왔습니다.  내밀만한 것 무엇하나 가지고 나오지 못했으니, 좀 암울하군요. 집에도 못말했고, 참 인생이 어찌될런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다음엔 좀 밝은 글로 찾아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